자금조달을 챙기는 회사와 그렇지 않은 회사의 5년 뒤

자금조달 준비도 · 2026-10-05 · 펀더블 자금조달 인사이트

같은 해에 창업하고, 아이템도 대표의 역량도 비슷한 두 회사가 있습니다. 5년 뒤 두 회사는 대개 다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자금조달을 챙기면 성장한다고 단순하게 결론 내리면 곧바로 반박당합니다. **연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그 반박까지 포함해 정리합니다.

같은 해 시작한 두 회사의 5년 뒤가 다른 이유

같은 해에 시작한 두 회사

같은 해에 창업한 두 회사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아이템도 비슷하고, 대표의 역량도 비슷합니다.

A사는 제품과 영업에만 집중합니다. 서류 쓸 시간에 매출 하나 더 올리는 게 낫다고 판단합니다.

B사는 매출도 챙기면서 자금조달을 하나의 업무로 관리합니다. 작은 지원금부터 시작해 하나씩 밟아갑니다.

A사의 판단도 합리적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5년 뒤 두 회사는 대개 다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왜 그런지를 감이 아니라 연구로 설명해보려 합니다.

가장 강력한 반박부터 짚습니다

먼저 이 주장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반박을 꺼내야 합니다. **원래 좋은 회사가 돈도 잘 받는 것 아닌가.**

이 반박은 정당합니다. 학계에서도 오래 다뤄온 문제입니다. 자금을 잘 받은 회사가 잘 성장한 것을 보고 자금조달이 성장을 만들었다고 하면, 인과가 거꾸로일 수 있습니다. 원래 유망한 회사가 심사에서도 뽑혔을 뿐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선택편의(selection bias)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진지한 연구들은 이 편의를 걷어내는 방법을 씁니다.

성향점수매칭

비슷한 조건의 기업을 짝지어 비교합니다.

이중차분법

시간에 따른 변화를 서로 견줍니다.

그렇게 걸러낸 뒤에도 남는 효과가 있다면, 그것은 진짜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남는 것들이 있습니다.

연구가 말하는 것 1. 정부 자금은 도장처럼 작동합니다

가장 일관되게 확인되는 것은 신호(signal) 효과입니다.

출발점은 정보 비대칭입니다. 투자자나 심사역은 이 회사가 잘될지 알 수 없습니다. 회사가 아무리 우리는 좋은 회사라고 말해도,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 믿을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신호**를 찾습니다. 신호이론이 말하는 구조입니다.

정부 지원사업 선정이 바로 그 신호입니다.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했다는 사실 자체가, 제3자가 이 회사의 기술과 사업성을 검증했다는 증명서 역할을 합니다. 학계는 이를 인증 효과(certification effect)라고 부릅니다.

실증 연구들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공 보조금을 받은 초기 기업이 이후 벤처투자를 유치할 가능성이 유의미하게 높아집니다.

미국 청정에너지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비슷한 조건의 기업들과 비교했을 때 연방 연구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이후 VC 투자를 받을 확률이 더 높았습니다.

SBIR 보조금이 품질 인증서처럼 작동해 후속 투자 가능성을 끌어올린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정부 연구보조금의 신호 효과에 관한 국내외 실증 연구

즉 자금은 돈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다음 자금을 부르는 증명서와 함께 옵니다.** 펀드레이징 루프의 학술적 실체가 이것입니다.

single

연구가 말하는 것 2. 신호는 가진 게 적은 회사에게 더 크게 작동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발견이 나옵니다.

같은 연구에서 보조금의 신호 효과는 특허를 많이 가진 기업보다 **특허가 적거나 아예 없는 기업에게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이미 내세울 것이 많은 회사는 정부의 도장이 없어도 신호가 충분한데, 내세울 것이 없는 회사에게는 그 도장이 결정적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연구자들은 이를 두고 정부 보조금이 자원이 풍부한 기업의 우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혜택을 재분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어차피 될 놈만 되는 것 아니냐는 흔한 체념에 대한 정확한 반박입니다. 뒤집으면 이렇게 됩니다. **가진 게 적을수록 첫 번째 신호를 만드는 일의 가치가 더 큽니다.** A사가 우리는 아직 내세울 게 없어서라며 미루는 동안, B사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첫 도장을 받으러 갑니다.

도장의 약발에는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같은 연구는 신호 효과가 보조금 수령 후 6개월 이내에서만 관찰되고 그 이후에는 사라진다는 점도 발견했습니다. 받아놓고 묵혀두는 것이 아니라, 받은 직후에 다음 자금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루프의 속도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연구가 말하는 것 3. 자금이 자동으로 성과가 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정직해져야 합니다. 연구 결과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는 않습니다.

정부 R&D 보조금이 기업의 자체 R&D 투자를 늘리는지, 아니면 원래 쓸 돈을 대체해버리는지를 두고 실증 결과는 엇갈립니다. 국내 연구만 봐도 보조금이 기업의 자체 투자를 촉진했다는 결과와, 오히려 대체했다는 결과가 함께 존재합니다.

다만 그 갈림길에서 흥미로운 조건들이 발견됩니다.

받은 돈이 인건비나 경상비로 흘러가면 대체 효과가 커집니다.

설비나 소프트웨어처럼 자본재적 투자로 가면 보완 효과가 커집니다.

벤처기업일수록 보완 효과가 뚜렷하다는 결과도 있습니다.

정부 R&D 보조금의 보완효과와 구축효과에 관한 국내 실증 연구

이것이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자금은 그 자체로 성장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 자금을 무엇으로 바꾸느냐가 성장을 만듭니다.** 급한 불 끄는 데 다 태워버린 회사와, 그 돈으로 사람을 뽑고 설비를 갖추고 다음 증거를 만든 회사의 5년 뒤는 다릅니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흡수역량(absorptive capacity)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외부 자원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그 자원이 성과가 됩니다.

그래서 A사와 B사의 5년

'Nano Banana AI 생성형 이미지'

이제 두 회사의 차이를 다시 설명할 수 있습니다.

A사, 자금조달을 잡무로 본 회사

자금조달을 서류 쓰는 잡무로 봤습니다. 그래서 첫 신호를 만들지 못했고, 신호가 없으니 정보 비대칭의 벽 앞에서 늘 불리했습니다. 투자자도 심사위원도 A사를 믿을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성장은 오직 내부 현금흐름의 속도만큼만 가능했습니다.

B사, 자금조달을 업무로 본 회사

자금조달을 관리해야 할 업무로 봤습니다. 작은 자금으로 첫 도장을 받고, 그 도장의 약발이 살아 있는 동안 다음 문을 두드리고, 받은 자금을 설비와 인력이라는 다음 증거로 바꿨습니다. 신호가 신호를 부르고, 자금이 자금을 불렀습니다.

그러니 정확한 표현은 이렇습니다. 자금조달을 챙겨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자금조달을 관리 가능한 업무로 다뤘기 때문에 성장의 제약이 하나 풀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약은 풀지 않으면 매년 그대로 남습니다.

연구가 주는 실천적 함의 세 가지

첫 신호를 만듭니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고용지원금이든 작은 지원사업이든, 제3자의 도장 하나가 다음 자금의 확률을 바꿉니다. 특히 내세울 것이 적은 회사일수록 그 효과가 큽니다.

신호가 살아 있을 때 다음으로 갑니다

도장의 약발에는 시한이 있습니다. 선정 직후가 후속 자금을 노릴 최적의 시점입니다. 받아놓고 몇 년 묵히는 것은 가장 아까운 낭비입니다.

받은 돈을 반드시 증거로 바꿉니다

인건비로 태워 없애는 대신, 사람과 설비, 기술과 실적처럼 다음 심사에서 내밀 수 있는 자산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회사가 가진 제3자의 도장을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선정 이력, 인증, 투자 유치 실적 가운데 몇 개가 있는지가 다음 심사의 출발점을 결정합니다.